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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상주의 두 대가 마네와 모네의 우정

파커파인 2007. 9. 5. 14:27
 피리부는 소년/ 마네
인상주의 두 대가 마네와 모네의 우정

중고등학교 미술시간에 항상 헷갈렸던 두 화가, 마네와 모네..
마네와 모네의 이름이 비슷해서 우리에게 한 쌍으로 기억되며 이런 혼란은 꼭 이름에서만
유래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우정이 돈독했고 서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1832년에 태어난 마네는 모네보다 8살이 많지만, 모두 동시대를 풍미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들이었다.
부유한 집안 출신 마네는 한 스승 아래서 6년 이상 수학하고 외국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는
좋은 조건에서 화가로 출발했지만, 가난한 상인의 아들 모네는 스스로 회화를 익히며 역경을
해쳐나가는 불리한 조건에서 화가로 출발했다.
 
 
모네, Le dejeuner sur l'herbe (The Luncheon on the Grass),
풀밭위의 점심식사
모네는 마네를 존경하여 마네를 알기전에 이미 그의 그림을 모작도 하였다.
마네는 일찌감치 국전에 입선하고 언론을 통해 문인들의 호평과 악평을 동시에 받으며 작품을 비싸게 팔 수 있었던 마네는 부르주아답게 유명한 제단사가 지은 전통 양복을 입고 다녔지만, 가난한 후배 화가들과 함께 카페에서 어울리면서 맏형노릇을 했다.

마네는 올랭피아의 악평이후 실제적인 인상파의 산실이 되는 바티뇰 불바드에 있는 게르부아에 화실을 연다.
젊은 화가들은 카페에 정기적으로 모여 등용의 문인 국전에 관해 주로 대화하면서 새로운 회화 경향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는데, 모네, 세잔, 르누아르, 바지유, 팡탱-라투르, 그리고 미국에서 유학 온 휘슬러 등이 자주 모인 이 카페 가까운 곳에 마네의 아파트가 있었고 마네는 부모 몰래 그곳에서 자신의 피아노 선생이며 연상의 네덜란드 여인 수잔과 동거하고 있었다.

카페 게르부아에 모인 화가들은 동네 이름을 따 '바티뇰 그룹' 혹은 '마네파'로 불리었다.
모네가 마네를 만난 것도 이곳에서였다.

그러나 마네와 모네의 첫만남은 순로롭지만 않았다...

 
 
모네, 녹색 드레스의 여인, 카미유, 1866
 
1866년 모네는 위 그림 <녹색 옷을 입은 여인, 카미유>로 살롱전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모네는 이 작품을 1865년에 그린 <퐁텐블로 숲속에 있는 사이의 길>과 함께 출품했고
두 그림 모두 받아들여졌다.)
 
그 날 사람들은 '마네'에게 멋진 그림을 그렸다고 축하를 아끼지 않았는데, 알고 보니 사람들이  모네의 <녹색 옷을 입은 여인>을 자신의 그림으로 착각, 찬사를 보낸 것이었다.
(하긴, 이 둘의 이름은 우리뿐만 아니라 프랑스 사람에게도 햇갈리는가 보다.)
마네는 이를 곧 알아차렸고 바지유와 그 친구들에게 다른 사람의 그림이 자신의 작품인 줄 착각하는 관객들에 대하여 불평하며 블쾌감을 표했다.  그러나 정작 훗날 마네를 더욱 불쾌하게 만들었던 것은 그날 바지유의 일행 중에 모네가 함께 있었다는 것이었다. (둘은 아직까지 모르는 사이였다.) 
그날 모네는 바지유과 함께 전시장을 돌다가 뜻하지 않게 마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으나,
마네에게 사과를 할 수도, 아는 척을 할 수도 없었다
(당시의 마네는 모네에게 있어 '큰형님' 또는 쳐다볼수도 없는 '높은' 사람이었다)
 
마네와 모네는 위와 같은 경우를 다시 한번 부딪히게 된다
다음해 '모네'는 자신의 바다풍경화가 걸린  오베르가(街)의 화랑 앞에서 우연히 마네를 다시 보게 된다.
정말 우연하게도 그림을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에 '모네'가 있는 줄 몰랐던 마네는, 모네의 면전에서 그의 그림 비꼬아 이야기하였다...
 
이러한 서먹한 관계는 마네가 사용하던 바티뇰 대로(Boulevard des Batignolles)에 있는 카페 게르부아(Cafe Guerbois)에서 3년이 지난 1869년 모네와 정식으로 인사하게 됨으로써 급격히 가까워 진다.
 
마네와 모네, 그 후의 이야기...

두 사람이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고 친구가 된 것은 첫 만남으로부터 3년이 지난 1869년 바티뇰의 한 카페에서였다.
서먹한 사이로 시작된 관계였으나, 두 사람은 곧 서로 마음이 통하는 친구임을 알아차렸다.
모네보다 여덞 살이나 연배가 높았던 마네는 젊은 친구의 재능과 그의 실험정신에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모네는 그런 마네를 선배로서 의지하였다.
 
1874년이후부터 마네와 모네의 우정은 돈독해 졌다. 마네는 모네와 함께 센 강둑에서 그림을 그렸다.
자연광선으로 조명된 〈뱃놀이 Boating〉라는 그림은 마네의 작품 가운데 가장 밝은 그림이며, 이 그림에서 그는 르프티제느 빌리에를 배경으로 두 사람이 햇빛을 받으며 배 안에 앉아 있는 광경을 그렸다.
 
Monet Working on His Boat in Argenteuil
마네작
 
마네가 〈아르장퇴유의 배 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 를 그린 곳도 아르장퇴유였다.
이 그림에서 모네는 중고로 사들인 낡은 배(당시 모네는 빈털터리였고, 마네는 그를 돕는 일에 돈을 아끼지 않았음)
안에서 아내를 그리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모네 가족의 단란한 한 때를 담은 마네의 작품은 당시 두 화가의 긴밀했던 우정을 짐작하게 한다.  모네는 마네에게 극심한 경제난과 불안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호소하였다.
그 때마다 마네는 그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았고, 모네는 맏형 같은 마네를 정신적인 지주로 따르게 되었다.
 
1865년 국전에 모네가 입선하면서 마네의 작품이 함께 소개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평론가들이 두 사람을 한 쌍으로 언급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작품이 국전에서 함께 소개되자 모네의 이름이 마네의 이름과 비슷하다고 지적한 평론가도 있었고, 어느 카툰리스트는 <모네냐 마네냐 - 모네다!>란 제목의 그림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러나 마네가 있음으로 해서 모네가 가능했다. 브라보, 모네! 고맙다, 마네!"

불리한 조건에서 성공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모네에게 더 점수를 줄 수 있지만, 작품을 통해 당시 부르주아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부잣집 아들의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정상에 먼저 올라 명성을 독차지하려는 이기심이 그때나 지금이나 화가들에게 있는데, 친구를 부축해서 함께 정상에 올랐다는 데서 마네의 고상한 인격은 회화와는 별개로 본받을 만하다.
 
-= IMAGE 4 =- 
Olympia[올랭피아] 1863 오르세 미술관
 
 
<올랭피아>로 빚을 갚은 모네..

마네가 죽은 후,
모네는 몇몇 지인들의 힘을 모아 1890년 <올랭피아>를 구입하여 루브르에 기증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는 직접 '팔리에르' 교육부 장관에게 편지를 보내 미술사에서 마네가 차지하는 의미, 그의 위대한 작품이 해외에 팔리지 않고 프랑스, 그것도 루브르 미술관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를 하나
하나 짚어가며 설득하였다.
 
모네의 노력은 자신을 비롯해 많은 젊은 화가들의 새로운 도전에 길을 터 주었던 선배를 향한
존경이었다.
마네 생전에 개인적으로 마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던 모네는 이렇게 마음의 빚을 갚았다...
 
"장관님, 우리는 <올랭피아>를 당신께 드립니다.
프랑스의 영광이자 기쁨이었던 작품들이 미국인들의손에 들어갈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가 <올랭피아>를 사기로 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올랭피아>는 화가정신과 통찰력의 스승인 마네의 위대한 승리의 기록입니다."
 
--모네 드림-1980년2월 7일 -
<'르 피가로지'에 실린 장관에게 보내는 모네의 편지 중에서>
출처 : 천년문학[천년그리움이 흐르는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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